대한제국의 성지 원구단圓丘壇
고종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1896년 정동 아라사(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하게 되는데 이 사건을 "아관파천"사건이라 하며, 이 사건으로 인해 정동이 한국 근대사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고종은 아라사 공사관에서 1년여를 머무르며 풍전등화에 놓인 나라의 미래를 고민했다. 당시 고종은 법궁의 역할을 하지않고 있던 덕수궁(경운궁)의 중건을 지시, 1897년 덕수궁으로 이어한다. 고종은 덕수궁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해 대내외에 근대적 자주국가임을 선언했는데 이 사실을 하늘과 땅 그리고 종묘사직에 고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선포하게 되는데 바로 이곳이 "원구단圓丘壇"이다.
원구단은 외세 열강들의 침략 속에서 "주권국가"인 대한제국을 공식화한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원구단은 원을 쌓아 그 위에 하늘의 상제님을 모시고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이다. 조선시대 내내 중국을 천자의 나라로 받들며 살아왔는데 고종이 천자를 칭하고 하늘의 상제님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중화주의에 벗어난 자주적 국가로써 거듭남을 의미한다.
마침내 고종이 파천한지 약 1년만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덕수궁)에 이르는 길에는 친위대 병정과 순검들이 늘어섰고 배제학당 학생들이 독립신문사 건너편에 정연히 늘어서서 만세를 불렀으며 어가御駕가 지나가는 길에 꽃을 뿌렸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국가의 자주독립을 기원하는 국민 감정을 여실히 설명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대한제국을 성립 시키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김순일 [덕수궁]에서>
고종은 덕수궁으로 이어한 해 8월 16일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반포하고 10월 2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할 원구단 축조를 명령했으며, 고종은 원구단을 쌓은 직후인 10월 11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다음날인 12일 원구단에서 역사적인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고종은 원구단에 나아가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드리고 황제皇帝에 즉위하였다.
원구단에는 황천상제皇天上帝를 비롯하여 황지지皇地秖 대명大明 야명夜明 별과 산천 기타 제 신위를 모셨다. 1899년에는 원구단 뒤편에 황궁우를 세워 신위판을 봉안하면서 태조를 태조고황제로 추존하여 배천配天하였다, 고 전하고 있다<홍순민저 [우리궁궐 이야기]>
원구단에는 신위를 모시는 황궁우 외에도 고종 즉위 40년이자 연세가 51세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석고石鼓를 1902년에 세웠다. 그러나 일제는 한일합병 이후인 1913년 원구단에 철도호텔을 세웠고 현제 조선호텔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으려는 일환이었다.
원구단은 거의 없어지고 황궁우와 석고만이 조선호텔과 프러지던트호텔등 고층 빌딩 틈바구니에 끼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황궁우는 굳이 찾아 들어가지 않으면 한길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아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게 있는 것조차 모르고, 외국인들만 조선호텔 높은 자리에 앉아서 아름다운 조선정원 하면서 호텔 뒤뜰로 알고 내려다보는 구경거리가 되어 있다고 한탄한다.<홍순민[우리 궁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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