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남부여)건국 이야기(상생출판 [북부여기])
백제라는 국호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먼저 중국의 [북사北史]와 [수서隨書]의 [백제전]에 따르면 백제라는 이름은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넜다(濟海)고 하여 붙여졌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기]의 [백제본기百濟本紀]에서는 온조가 처음 위래성에 도읍할때 10인의 신하가 도왔으므로 처음에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뒤에 온조의 형 비류가 죽고 그 백성이 온조에게 귀복하고 나서 백제百濟로 고쳣다고 하였다. 또한 백제를 건국한 온조의 이름을 따서("온"은 백이란 뜻의 고유어) 백제라 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삼한관경본기]에서 살펴보면 고조선 번한 초대 임금 차두남이 요중에 쌓은 12성 가운데 백제라는 성이 있었으므로 소서노가 대방 고지의 백제땅에 정착한것이 계기가 되어 훗날 백제가 건국 되었다고 하는것이 합당할 것이다.
백제의 뿌리는 부여다, 부여의 건국 이야기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태백일사]의 기록이 약간 다르며 [태백일사]에 더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 [삼국사기]의 기록을 먼저 살펴보면
백제의 뿌리 역시 부여이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어머니는 소서노였다. 소서노는 고구려의 창업 공신인 연타발의 딸로 동부여 왕 해부르의 서손인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우태가 죽고 졸본에서 과부로 지내던 중 아버지 연타발이 고주몽의 창업을 도운 것을 계기로 주몽 성제의 왕비가 되었다. 유력 가문 출신인 소서노는 많은 재산을 갓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데 재물로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런데 고주몽은 일찍이 동부여에 남기고 온 부인 예씨 소생인 적자 유리가 오자 그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소서노가 낳은 아들들인 비류와 온조는 장래를 걱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 땅에 눌러 앉아 있는것이 이로울것이 없음을 알고 남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소서노의 두 아들은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류는 미추홀(오늘날의 인천지역), 온조는 한강 이남에 정착하였다. 온조는 하남에 위래성을 쌓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백제의 건국사화이다.
▶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의 기록(소서노 왕국과 온조)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삼국사기]의 내용과는 약간의 다른 내용이지만 좀더 자세한 기록이 있다. 소서노는 유리를 태자로 삼을 것이라는 말에 자기가 낳은 두 아들의 장래를 염려하였다. 그러던 중 사람들로 부터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패대의 땅은 현제의 하북성 난하 부근이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이주하여 발해 연안에 있는 진, 번 사이의 지역에 정착하였다. 밭을 사고 농장을 세워 많은 돈을 벌었다. 인근에서 그 소문을 듣고 가세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주몽에게 사람을 보내 고구려에 귀속되기를 원했는데 주몽은 이를 기뻐하며 소서노를 "어하라"에 책봉하였다. 어하라는 백제의 초기 왕을 말한다. 그러므로 백제는 소서노 시기에 사실상 건국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사서에 백제의 건국지를 요서군에 있는 대방고지라고 한 기록이 이를 입증해 준다고 할것이다.
BC 19년 소서노가 죽자 장자 비류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이때 마려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동생 온조에게 "마한의 쇠망이 임박하였으니 가서 도읍을 세울 때"라고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미추홀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이곳은 텅빈 땅이어서 사람이 살지 않았다. 오랜 뒤에 하남의 위지 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이 바로 하남 위래성이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백제라 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든, [태백일사]의 기록이든 백제는 건국 주체가 부여족이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백제 왕의 성씨가 부여씨였음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한 백제가 옛 부여에 대한 계승의식을 강렬히 유지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백제 26대 성왕(522~554)은 538년 웅진(공주)에서 삽(부여)로 천도하면서 부여족의 뿌리 깊은 번통을 강조하여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던 것도 이런 의식의 발로였다.
▶ 부여 문화의 일본전파
초기 일본 왕실은 부여계에서 나왔다. 일찍이 기다 사다기지 등은 일 본 왕실의 조상이 부여, 백제계였다고 밝힌바 있다. 에가나오미 동경대학교수도 일본 국가의기원이 동북아시아의 부여와 고구려계 기마민족의 일본 정복에 있다는 기마민족국가설을 발표하여 학계를 뒤흔들었다. 그는 부여계가 일본을 정복하여 일본역사 최초의 고대국가 건설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소위 야마토정권(370년)을 세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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