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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국시대] 고구려의 건국

[사국시대] 고구려의 건국

 

지계해춘정월하야 고추모가 역이천제지자로 계북부여이흥하사

至癸亥春正月하야 高鄒牟가 亦以天帝之子로 繼北夫餘而興하사

복단군구장하시고 사해모수하사 위태조하시고 시건원하사

復檀君舊章하시고 祠解慕漱하사 爲太祖하시고 始建元하사  

위다물이라하시니 시위고구려시조야시니라.[삼성기 상]

爲多勿이라하시니 是爲高句麗始祖也시니라.[삼성기 上]

 

계해(BCE 58)년 겨울 10월에 이르러 고추모(고주몽)가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그리하여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시조로 받들어 제사지내고 연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 하시니 이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이시다. 

 

다물多勿은 고주몽이 건국한 고구려의 연호이며 고구려의 국시國是이다. "배달국 신시 시대와 단군조선 시대의 옛 강토와 신교문화를 다시 부흥시켜 회복한다[復舊]는 고구려의 거국적 민족 운동과 그 정신을 말한다.

 

동명왕은 과연 누구인가?

부여의 계승자임을 표방한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신화에 부여의 동명왕 신화가 재현되어 있다. 동명신화는 최초의 기록인 [논형](1세기) 부터 6세기 문헌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아닌 부여의 건국신화로 구분하고 있는데 반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동명왕편} 등에서는 주몽의 건국 신화로 되어있다. 따라서 동명왕이 어떻게 왜곡됐느냐 하는 실체가 오직 이 [삼성기]에서만 밝혀지고 있다.

 

BCE 108년 한나라 무제가 요하의 우거정권(우거는 번조선을 찬탈한 위만의 후손)을 멸한 뒤 군현을 설치하고자 대군을 동원하여 동방(당시 북부여)을 침략했다. 이때 거국적으로을 이르켜 파국지세로모아오는 한족 침략군을 막아낸 북부여의 구국영웅이 고두막한이다.

 

고조선 47세 고가열단군의 후손인 그는 거병에 앞서 졸본에서 동명왕으로 즉위하였고, 훗날 민심을 얻어 북부여 5대 단군에 즉위하였다. 동명은 흔히 고구려를 개국한 주몽으로 알려져 있으나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산의 묘지명에 "옛날에 동명은 기운에 감응되어 표천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광명으로 잉태되어 패수에 임하여 도읍을 열었다"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이 전혀 다른 인물임을 밝혀주고 있다.<상생출판 [삼성기]>